부활의 영광(벌레에서 천사로, 죽음 너머의 눈부신 약속)🌸
애벌레가 날개를 펼치는 날
어릴 때 여름이면 매미 소리에 잠을 깨곤 했다. 그 소리가 그렇게 시끄러울 수가 없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 매미가 어떻게 태어나는지를 한 번도 제대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매미 애벌레는 땅속에서 산다. 짧으면 3년, 길면 17년씩이나. 빛도 없고, 날개도 없고, 그냥 뿌리에 붙어서 수액만 빨다가 시간을 보내는 거다. 그러다 여름이 되면 땅 위로 기어 나와 나무껍질에 몸을 붙이고, 등이 갈라지면서 은빛 날개가 돋아난다. 땅속의 그 굼벵이가 하늘을 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잠자리도 마찬가지다. 물속 바닥을 납작하게 기어다니던 애벌레가 때가 되면 물 밖으로 나와 1초에 20~30회 날갯짓하는 비행사가 된다.
솔직히 그 애벌레만 보고 있으면 상상이 안 된다. 저게 날 수 있다고?
그런데 성경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하나님의 눈에는 달이라도 명랑치 못하고 별도 깨끗지 못하거든, 하물며 벌레인 사람, 구더기인 인생이랴." (욥기 25:5~6)
처음에 이 구절을 읽었을 때는 솔직히 좀 서글펐다. 벌레, 구더기. 고운 표현이 아니다. 그런데 나중에 생각해보니까, 성경이 우리를 벌레에 비유한 게 단지 우리를 낮추려는 게 아니었다. 벌레에게는 반드시 날개를 펼치는 날이 오니까. 하나님께서 그분을 믿는 자에게 약속하신 변화가 바로 그것이었다.
부활이라는 말을 제대로 들여다보면
성경에서 '부활'이라는 단어가 나올 때, 사실 두 가지 다른 이야기가 섞여 있다.
엘리야의 기도로 다시 살아난 사렙다 과부의 아들, 예수님이 무덤에서 불러내신 나사로, 사도 베드로가 손을 잡아 일으킨 다비다. 이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기적이다. 그런데 이분들도 결국 나중에 돌아가셨다. 그러니까 이건 잠시 돌아온 것이지, 성도들이 진짜 기다리는 그 부활은 아니었다.
예수님은 이걸 구분해서 말씀하셨다.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 바울도 이 두 가지가 반드시 온다고 이렇게 증거했다.
"저희의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 (사도행전 24:15)
두 갈림길이다. 먼 훗날의 이야기 같지만, 사실 지금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느냐가 이미 그 길을 걷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마지막 나팔 소리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이런 표현을 썼다. "비밀을 말하겠다"고. 성경에서 비밀이라고 할 때는 귀가 쫑긋해진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고린도전서 15:51~52)
홀연히. 순식간에. 그냥 변화가 아니라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나는 변화다. 데살로니가전서에는 그 장면이 더 구체적으로 나온다.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가슴이 이상하게 뛴다. 수천 년을 잠들어 있던 영혼들이 일어나고, 살아있는 자들은 구름 속으로 끌려 올라가 주님을 마주하는 그 장면. 어떤 영화도, 어떤 소설도 이 장면을 다 담을 수는 없을 것 같다.
그 몸이 어떤 몸인지
부활한 후의 우리 모습에 대해 궁금해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성경은 그것을 '신령한 몸',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이라고 부른다.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고린도전서 15:44~49)
부활하신 예수님이 어떤 모습이셨는지를 보면 조금 감이 온다. 잠긴 문을 통과해서 들어오셨고, 나타났다 사라지셨다. 사도 바울이 환상에서 만났을 때 그 빛이 대낮 태양보다 강렬했다고 했다. 공간이나 시간 같은 것들이 더 이상 제약이 되지 않는 존재.
예수님은 이렇게도 말씀하셨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마태복음 22:30)
천사. B.C. 530년경 다니엘이 기도를 시작했을 때, 천사 가브리엘은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에서 출발해서 다니엘의 기도가 끝나기 전에 도착했다. 우리 은하 지름만 10만 광년이는데?, 빛이 1년을 달려야 1광년. 그 공간을 기도 한 번 하는 동안에 건너온 거다. 그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불 앞에서 기도한 사람
초대교회 성도들 이야기를 읽다 보면 가끔 이해가 안 될 때가 있다. 어떻게 그렇게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였을까.
서머나 교회의 감독 폴리카르포스라는 사람이 있었다. 화형이 결정됐는데, 그가 화형대에 두 손이 묶인 채로 기도한 내용이 『유세비우스의 교회사』에 남아 있다.
"오늘 이 시간 나로 하여금 순교자의 반열 그리고 그리스도의 잔치에 참여하게 하시어, 내 몸과 영혼이 성령의 썩지 않는 축복 속에서 영의 부활을 얻기에 합당하다고 여겨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불이 붙고 있는 상황에서 그가 생각한 건 부활이었다. 두렵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너머에 뭐가 있는지를 알았기 때문이었을 거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바울도 3차 전도여행 내내 매 맞고 감옥에 갇히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히브리서에는 이런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히브리서 11:35)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고난을 피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부활의 소망이 그들에게 그런 힘을 줬다.
그 부활에 어떻게 참여할 수 있는가
예수님은 단지 부활이 있다는 것만 말씀하신 게 아니라, 그 부활에 참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까지 알려주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요한복음 11:25~26)
그리고 더 구체적인 말씀이 요한복음 6장에 나온다.
예수님의 살과 피. 이것이 새 언약 유월절 성찬을 가리킨다는 것을, 마태복음 26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십자가를 앞둔 그 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떡을 나누시며 "이것은 내 몸이라" 하셨고, 잔을 들어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태복음 26:28)
초대교회 사도들이 어떤 핍박 속에서도 이 새 언약을 지켜낸 이유가 있었다. 이것이 생명의 부활로 가는 길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세세토록
생명의 부활을 받은 성도들이 들어가는 그 자리를 요한계시록은 이렇게 전한다.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요한계시록 20:5~6)
그리고는.
세세토록. 이 말이 참 묘하다. 끝이 없다는 거잖아. 죽음도, 이별도, 어둠도 없는 자리에서 왕 노릇 한다는 게. 말이 되는 것 같으면서도, 머릿속으로 완전히 그려지지가 않는다. 아마 지금 우리 몸으로는 다 담을 수 없는 개념이라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지금 어디를 보고 있는가
다시 매미 이야기로 돌아가자.
그 굼벵이는 땅속에서 길게는 17년을 보낸다. 빛도 못 보고, 하늘도 모른 채. 그런데 그 시간이 헛된 게 아니었다. 때가 되면 나와서 날개를 펼치는 날이 오니까. 그 기다림이, 그 어두운 시간이 다 그날을 위한 준비였던 셈이다.
우리가 지금 걷고 있는 이 땅의 시간도 어쩌면 그런 것 아닐까. 고단하고, 흔들리고, 도무지 언제 끝날지 모르는 것들 속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썼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베드로전서 1:3~4)
하늘에 간직된 기업. 이미 당신 이름으로 예비된 것이 있다는 말이다.
부활의 영광은 저 먼 미래 어딘가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을 믿고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의 가슴 안에서 이미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빛나고 있는 약속이다.🌿
부활에 함께 할 수 있는 새언약 꼭 지켜서 천국 가야 겠어요!!
답글삭제부활의 산 소망을 심어주신 엘로힘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
답글삭제죄인된 몸으로 신령한 몸으로 변화받을 수 있도록 모든길 인도하여 주신 엘로힘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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